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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일본군 성노예제② 오키나와에 위안소가 144곳이나 있었다-위안소 터를 찾아서(1)

KINN 2026.10.21

오카모토 유카(岡本有佳)

한국독립언론네트워크 KINN 회원사인 일본 독립언론 ‘뉴스 유이((ニュース結)’는 KINN의 2026년 탐사기획보도 지원을 받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는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군 위안부’와 ‘인권침해 전쟁범죄’ 두 갈래로 진행합니다. KINN은 이 시리즈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해 ‘뉴스 유이’와 동시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한국독립언론네트워크(KINN)와 함께하는 프로젝트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는 '검증: 일본군 성노예제'와 '검증: 우생사상에 근거한 의료 윤리와 인권침해'라는 두 개의 축을 세워, 당시 실태와 배경을 공문서, 전문가 연구, 시민의 조사와 기록, 현지 취재에 근거해 다방면에서 검증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이 점을 먼저 확인해 두는 것은, 일본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외교 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2015년에 발표한 한일 '합의'(*1)로 '위안부'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처럼 다룬 언론 보도 영향이 클 것이다.

일본군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침략·점령한 아시아태평양 각지에 일본군 장병을 위한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것이 얼마나 광범위했고 얼마나 많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일본군 위안소 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계속 업데이트 중이다(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홈페이지에 최신판 수록, https://wam-peace.org/ianjo/map/).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인, 대만인,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동티모르인, 인도네시아로 이주한 네덜란드인, 태평양 제도 여성들, 오키나와와 본토 일본인이 있었다. 일본과 식민지의 여성들은 먼 곳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에 끌려가 '위안부'가 되기를 강요당했다. 중국 등 점령지에서는 '위안부' 제도 같은 형태가 아닌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도 다수 있었다. 어떤 경우든 일본군의 성노예·전시 성폭력이며, 공통점도 있지만 징집 방법이나 위안소에서의 처우에는 민족·인종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2).

▶ 일본군 위안소 지도. (출처: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https://wam-peace.org/ianjo/)

오키나와에는 위안소가 144곳이나 있었다-시민 조사로 지도 작성

나아가 현재 한일 모두 사회적으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오키나와에도 시민과 연구자들의 손으로 1990년대에 작성되어 계속 업데이트 중인 '오키나와의 위안소 지도’가 있다. 일본군 위안소는 오키나와전(*3)에 대비해 일본군이 배치된 오키나와현 전역에 설치됐고, 그 수는 무려 144곳에 이른다.

'오키나와의 위안소 지도'는 1992년 9월 처음 발표됐다. 이 시점에 확인된 것만 해도 연 121곳이었으며, 지도에서 보듯 오키나와 곳곳에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국내에 이렇게 많은 위안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위안소 지도'는 1992년 9월 나하시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국 여성사 연구 교류 모임' 주최 단체 중 하나인 '오키나와 여성사를 생각하는 모임'(대표 가카즈 가쓰코[賀数かつ子]) 소속 6명이 작성했다. 이들은 시정촌사(市町村史, 시·정·촌 등 기초자치단체가 펴낸 지역사: 옮긴이)와 증언 등을 바탕으로 조사해 이 지도를 만들어 발표했다.

▶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를 조사·작성한 구성원 명단.

▶ '전국 여성사 연구 교류 모임'의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 관련 자료집

위안소 지도 발표에 앞서 1992년 4월 22일 제123회 정기국회 중의원 외무위원회(위원장 아소 다로)에서, 공명당·국민회의 소속 다마키 에이이치(玉城栄一) 의원의 질문에 기무라 마사유키(木村政之) 내각관방 내각외정심의실 내각심의관이 오키나와현 내에서 10여 곳의 위안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발표에 대해 '전국 여성사 연구 교류 모임' 실행위원회는 "일본 정부의 너무나도 허술하고 무성의한 자세에 분노"해 이틀 뒤인 2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자체 조사로 정부 조사를 훨씬 웃도는 51곳의 위안소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 제12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 제7호 회의록 중. 1992년 4월 22일 (출처: https://kokkai.ndl.go.jp/simple/detail?minId=112303968X00719920422)

▶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 『오키나와현사 각론편 6 오키나와전』(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 2017년)의 「일본군 위안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당시 지도 작성·조사에 참여한 우라사키 시게코(浦崎成子) 씨는 "우리는 문헌이나 오키나와전 증언 등을 통해 위안소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쟁범죄라는 의식은 없었다"고 돌아본다.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 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밝힌 뒤 12월에 김 씨 등 '위안부' 피해자 9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우라사키 씨 등은 한국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여성에 대한 최대의 전쟁범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국 여성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 주지 않았다면 위안소 지도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오키나와의 위안소 지도 제작 과정을 돌아보는 우라사키 시게코 씨. (2026년 9월 10일, 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 우라사키 씨 자택에서, 촬영: 오카모토 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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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오키나와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재판은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문제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각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름을 밝히고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44년 한반도에서 오키나와 도카시키섬(渡嘉敷島)으로 끌려와, 1970년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고발한 배봉기(1914~1991) 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계기 중 하나였다.

이렇게 완성한 '위안소 지도'는 이후 시정촌사의 오키나와전 조사로 밝힌 새로운 위안소를 추가하며 갱신해 나갔다. 오키나와 미야코섬(宮古島)에서는 연구자와 지역 주민들이 공동 조사를 했다. 최신판은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에서 공개하고 있다(https://wam-peace.org/ianjo/area/area-jp/area-jp-47/). 현재는 총 144곳이 확인됐다. 조선과 오키나와 여성, 소수이지만 대만과 현 밖의 여성들이 있다.

뉴스 유이 취재진은 이번에 지도에 있는 위안소 터 가운데 6곳을 찾아갔다. 시마지리군 하에바루초(南風原町)가 운영하는 하에바루 문화센터(https://www.town.haebaru.lg.jp/site/kankou/12657.html)의 상설 전시에서는 하에바루에 설치된 위안소를 소개했다.

▶ 하에바루문화센터 상설전. (2026년 5월 18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하에바루에는 1983~1996년 13년에 걸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쟁 피해 상황을 상세히 파악한 조사보고서 『하에바루초 오키나와전 전재(戦災) 조사』 전 12권이 있다. 12개 아자(字, 마을)별로 보고서가 정리돼 있다. 하에바루에는 군 시설로서 쓰카잔(津嘉山), 데루야(照屋), 야마가와(山川) 세 마을에 위안소가 있었다. 다음 3권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쟁 피해 상황을 상세히 파악한 조사보고서 『하에바루초 오키나와전 전재 조사』 중 위안소에 관해 기술한 3권. 왼쪽부터 『쓰카잔이 말하는 오키나와전』, 『데루야가 말하는 오키나와전』, 『야마가와가 말하는 오키나와전』

쓰카잔의 위안소 터를 걷다

위안소가 있었다고 증언한 곳을 몇 군데 걸어 보았다.

쓰카잔에서는 공민관(마을회관) 사무소와 산업조합에 위안소가 설치됐다. 전쟁 중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공민관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광장이 되어 아이들 놀이터로 쓰인다.

▶ 쓰카잔에서는 마을 사무소(가운데 위)와 산업조합(오른쪽)이 위안소가 되었다. (출처: 하에바루문화센터 전시 패널)

미야히라 쓰루(가명) 씨의 수기·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쓰지 유곽(*4)의 여성인 '주리(예능과 접대를 맡은 여성)' 10여 명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성'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들은 감독하는 여성과 함께 민가에 묵었다.

▶ 휴양일이면 이 골목에 일본군 병사 줄이 늘어섰다고 한다. (2026년 5월 18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쓰카잔이 말하는 오키나와전(津嘉山が語る沖縄戦)』에 따르면, 휴식일이 되면 광장 옆길에 있는 위안소 두 집 건너 있는 집 대문까지 일본군 병사 줄이 늘어섰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 길을 바라보니, 위안소를 이용하려고 차례를 기다리던 일본군 병사들의 행렬이 떠오르는 듯하다.

쓰고 버려진 삿쿠(콘돔)를 아이들이 불어서 풍선 놀이를 하는 바람에, 마을 임원이 삿쿠를 제대로 처리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었다.

'위안부' 여성들이 "힘들어, 힘들어" 하며 울었다는 증언도 있다.

데루야의 위안소 터를 걷다

지금은 다른 민가가 들어서 있어 사진은 싣지 않지만, 데루야에서는 1944년 10월 10일 공습(*5) 이후 마을 공민관과 창고 두 동을 위안소로 개조했다. 다다미 3장(약 1.5평)정도의 작은 방이 7개쯤 만들어졌다. 입구 문에 위안소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위안소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피야'라고도 불렸다.

마을 안에 있던 탓에, 위안소 앞에 죽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아이들은 큰 영향을 받았다.

데루야의 '위안부'는 10대부터 25세 정도까지 나하 쓰지 유곽의 주리들이었다고 한다.

야마가와의 위안소 터를 걷다

야마가와에서는 목욕탕 건물을 사용했으며, 쓰지 유곽의 여성 4명이 '위안부'가 되도록 강요당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위안소 앞에는 일본군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고 한다.

우헤이바시(宇平橋) 부근의 위안소에는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114점의 콘돔…일본군이 군수물자로 보관 지급했다는 사실 보여줘

하에바루 문화센터는 오키나와전 전쟁 유적 발굴 조사를 오랫동안 해 왔고, 조사 성과를 공개 전시했다. 오키나와전 당시 교통의 요충지인 하에바루에는 전선을 떠받치는 많은 후방 지원 부대와 의료·사령부 관련 부대가 배치됐다. 쓰카잔에는 당초 제32군 사령부가 사용할 호(壕, 통칭 '제32군 사령부 쓰카잔 호군[壕群]')가 구축됐지만, 결과적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사령부 중추는 슈리(首里)로 옮겨 갔고 전투를 지원하는 부대가 배치됐다. 또 제32군 사령부 쓰카잔 호군 주변에 구축된 호에도 후방 지원 관련 부대가 배치됐다.

그것은 2009년에 발굴 조사한 쓰카잔 북지구의 구 일본군 호군 가운데 하나인 D-1호(壕)의 유물 속에 있었다. 이번에 하에바루 문화센터 학예원들의 협조로 특별히 수장고에서 꺼내 촬영할 수 있었다.

비닐봉지 안에 새까만 고리가 잔뜩 엉겨 붙어 있다. 천연고무 라텍스가 열화해 굳으면서 검게 변한 것이다. 이것이 발굴한 콘돔이라고 한다. 114점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자세히 보면 고무의 얇은 막 부분은 열화해 사라지고 롤 모양으로 말린 부분만 남아 고리 모양이 되었다. 당시 육군에서는 '돌격일번(突撃一番)', 해군에서는 '철모(鉄兜)'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콘돔은 단지 하에바루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뿐 아니라, 일본군이 군수물자로 콘돔을 보관하고 지급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114점이 한꺼번에 출토된 콘돔. (2026년 9월 10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 손바닥 위에 놓인 콘돔 한 개. (2026년 9월 10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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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옛 일본군 진지에서 발굴된 콘돔 114점

D-1호와 이어진 D호는 세 방향으로 출입구가 있는 세로 길이 160미터 안팎의 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야전화물창(*6) 관련 부대가 사용·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D-1호에서 의료용품 1386점이 출토됐는데, 그 가운데 이 콘돔 114점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이다. 불에 탈 때 열기로 찢어지거나 그을은 상태였다.

▶ 발굴 당시의 콘돔(왼쪽). 당시에는 아직 말려 들어가지 않은 부분도 조금 남아 있었다(오른쪽). (출처: 『하에바루초 문화재 조사보고서 제8집 쓰카잔 북지구 구 일본군 호군(壕群) Ⅱ)

▶ 하에바루초 교육위원회가 편집·발행한 『하에바루초 문화재 조사보고서 제8집 쓰카잔 북지구 구 일본군 호군 Ⅱ』 표지. (출처: https://web.d-library.jp/haebaru/g0102/libcontentsinfo/?conid=293658&m=南風原町文化財調査報告書第8集%E3%80%80津嘉山北地区旧日本軍司令部壕群Ⅱー津嘉山北土地区画整理事業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ー)

위 쓰카잔 북지구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위안부가 '힘들어, 힘들어' 하며 울었다"는 증언도 실려 있다. 발굴 조사에 참여한 하에바루문화센터 학예원은 이 책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전쟁 유적 조사에는 꿈이 없다. 희망도 없다. 파면 팔수록 괴롭고 무거운 감각이 더해 간다" 그러나 유적 조사는 새로운 전쟁 유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도 했다.

오키나와 북부로 향하는 길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미군 기지인 가데나(嘉手納) 기지 근처의 위안소 터에 들렀다.

마키바루(牧原)의 위안소 터-철혈근황 농림대 호 터

광대한 가데나 기지 옆을 지나 가데나 야구장을 지나면, 구도쿠바시(久得橋)를 건넌 곳에 공원 주차장이 있다. 거기서 히샤가와강(比謝川)을 따라 농로를 내려간다. 얼마 뒤 눈앞에 울창한 덤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바위 표면에 움푹 팬 곳이 몇 군데 보이는 곳이 있다. 여기에 농림대가 구축한 호가 있었다고 한다.

▶ 울창한 덤불 안쪽으로 바위 표면이 보이고 움푹 팬 곳이 몇 군데 있다. 여기에 농림대가 구축한 호가 있었다고 한다. (2026년 5월 18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1945년 3월 26일 철혈근황대(鉄血勤皇隊) 농림대(남자 학도대)가 편성되어, 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 학생 130명이 동원됐다.

철혈근황 농림대 호 앞에 연립식 건물 형태의 위안소가 세워졌다. 이것이 제44비행장대대의 위안소 '군인구락부 히샤가와 제2숙소(軍人倶楽部比謝川第二寮)'였다. 길이는 10m 안팎이었고, 조선 여성이 10~15명 있었다고 한다.

▶ 위 사진의 호 앞에 위안소가 세워져 있었다. (2026년 5월 18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하에바루처럼 마을 안에 만든 위안소에는 오키나와 여성이 많았지만, 이곳처럼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든 위안소에는 조선인 여성이 많았던 것 같다.

[다음 회에 계속]

번역감수: 조연우

주

*1 2015년 12월 28일 발표된 한일 외교장관 '합의'를 가리킨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듬해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일본 심의 결과가 공표됐다. 위원회는 이 '합의'에 대해 "피해자 중심 접근을 충분히 채택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진실·정의·피해 회복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2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저 『일본군 위안부(日本軍慰安婦)』(이와나미신서, 2025년) 등 참조.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역사 연구서는 수없이 많지만, 이 책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간결하고 읽기 쉽다.

*3 오키나와전: 제2차 세계대전 말기(1944년 3월), 일본군은 육군 제32군(다마[球]부대/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満] 중장)을 오키나와에 배치했다. 제32군은 오키나와 각지에 비행장을 건설했고,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상정하고 장기 지구전을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일본군은 10만 명을 넘는 장병을 위해 오키나와 전 지역에 연 144곳의 위안소를 설치했다. 오키나와현 인구는 약 60만 명으로, 현 밖으로 피난한 사람을 제외한 약 50만 명이 휘말리고 12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한국 시민이 알기 쉽게 말하자면, 마찬가지로 많은 시민이 희생된 한국전쟁 같은 대참사가 제주도 면적의 1.2배인 오키나와 전역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4 쓰지 유곽: 오키나와에서는 류큐 왕정 때부터 유곽이 공설(公設)되었다고 한다(1672년).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가운데 1881년 오키나와현은 「대좌부 및 창기 규칙(貸座敷並娼妓規則)」을 정해 유곽 여성을 공창 제도 아래 두었다. 주리란 유곽에서 생활하는 예기(芸妓)나 창기(娼妓)를 가리킨다.

1944년 7월 이후 일본군이 주리를 모아 위안소로 데려갔다.

*5 10·10 공습: 1944년 10월 10일, 북으로는 아마미 군도에서 남으로는 미야코·야에야마까지 난세이 제도(南西諸島) 전역이 미군 공습을 받았다. 그 결과 나하는 90%가 잿더미가 되었고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쓰지 유곽도 모두 불탔으며, 이후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가 되도록 강요당한 이도 많았다.

*6 야전화물창(野戦貨物廠): 대일본제국 육군에서 무기와 탄약 이외의 물자 보급과 관리를 담당한 군 기관.

[주요 참고문헌]

『오키나와현사 비주얼판 14 오키나와전(沖縄県史ビジュアル版14 沖縄戦)』 오키나와현 교육청 문화재과 사료편집반 편집/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2025년

『제10회 특별전 군대는 여성을 지키지 않는다—오키나와의 일본군 위안소와 미군의 성폭력(第10回特別展 軍隊は女性を守らないーー沖縄の日本軍慰安所と米軍の性暴力)』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편집·발행/2024년 제3판

「오키나와전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전개(沖縄戦における日本軍「慰安婦」制度の展開)」(1)~(4) 고가 노리코(古賀徳子)/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계간 『전쟁책임연구』 60~63호/2008~2009년

「오키나와전과 군 '위안부'(沖縄戦と軍『慰安婦』)」, 『'위안부'·전시 성폭력의 실태 Ⅰ(일본·대만·조선 편)(「慰安婦」戦時性暴力の実態I(日本・台湾・朝鮮編))』/우라사키 시게코(浦崎成子)/VAWW-NET 재팬 편/료쿠후출판/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