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일본군 성노예제① 위안소는 '군 시설'이었다-진중일지로 실증
KINN·생활뉴스커먼즈 공동 프로젝트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는 '검증: 일본군 성노예제'와 '검증: 우생사상에 근거한 의료 윤리와 인권침해'라는 두 개의 축을 세워, 당시의 실태와 배경을 공문서, 전문가의 연구, 시민의 조사와 기록, 현지 취재에 근거해 다방면에서 검증한다.


▶ 한국 한신대 하종문 교수의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일본어판(왼쪽, 호세이대학출판국, 2026년 8월 간행)과 한국어판(휴머니스트, 2023년 1월 간행)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으로부터 81년이 지난 2026년 8월 10일, 현존하는 방대한 '진중일지(陣中日誌)'를 발굴해 일본군 위안소가 '군 시설'이었음을 실증한 약 600쪽에 달하는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군 시설로서의 이용 실태』(陣中日誌にみる日本軍慰安所——軍施設としての利用の実態)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됐다. 이 책의 저자인 하종문(河棕文) 한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일본 근현대사)에게 책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진중일지'란 대일본제국 육군 중대 이상 부대가 전지(戰地)에서 작성한 일지를 말하며, 동원령을 수령한 날부터 복원(復員)을 완료하는 날까지 작성이 의무화된 공식 기록이다. 이 책에 따르면 다수의 '진중일지'는 정부 문서와 마찬가지로 패전 전후에 조직적으로 소각되거나 전투 중에 소실됐다. 원본은 방위성 산하 방위연구소가 소장하고, 오키나와전에 참전한 부대의 '진중일지' 일부는 내각부 산하 '오키나와전 관계자료 열람실'에서도 검색과 열람이 가능하다.

▶ 일본군이 의무적으로 작성한 공식 기록 '진중일지' 표지(출처: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이들 문서를 디지털화해 공개한 곳이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정권 때 발표한 평화우호교류계획의 일환으로 2001년에 개설됐다. 일본제국 시대부터 패전 후까지의 다종다양한 공문서는 이제까지 선행 연구에서도 활용돼 왔지만, 하 씨는 위안소와 '위안부'가 기재된 '진중일지' 전체를 통독하고 해당 부대와 관련 부대의 여러 자료와 대조해 10년에 걸친 장기적, 종합적 고찰을 시도했다.
콘돔 100만 개를 육군성이 공수(空輸)로 보낸 이유
하 씨에 따르면, 이 책은 선행 연구에서 간과됐던 성병 실태와 콘돔 조달, 일본군 급여와 군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이 책이 처음으로 밝힌 사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육지밀수 제495호(陸支密受第四九五)' 문서는 상하이파견군이 위안소 설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증거다.
이 문서는 육군성 경리국 건축과가 '위생방독품'(콘돔)을 추가로 보내는 건에 관해 쇼와 13년(1938년) 1월 15일 자로 기안했다.

▶ 상하이파견군으로 콘돔 발송을 의뢰한 문서(출처: 「위생방독품 추송에 관한 건」 『지수대일기(密) 기8 쇼와 13년 2월 24일부터 2월 27일까지(支受大日記(密)其8 昭和13年自2月24日至2月27日)』)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46쪽 도판을 가공했다.

▶ 콘돔 발송을 의뢰한 문서의 별지 '추송 품목 수량조서' 부분(출처: 「위생방독품 추송에 관한 건」 『지수대일기(密) 기8 쇼와 13년 2월 24일부터 2월 27일까지』)
콘돔 100만 개를 육군성에 전보로 요청한 이는 상하이파견군 참모장 이이누마 마모루(飯沼守) 소장(1888~1978)이었다. 품목란에는 "위생방독용 '삿쿠[콘돔]' 1,000,000개, 가장 빠른 편으로 송부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12월 29~30일 항공편으로 상하이파견군 야전의량창(野戰衣糧廠)에 보냈는데, 이는 12월 말 위안소 개설에 맞춰 콘돔 조달을 서둘렀고 육군성이 신속하게 발송했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첨부된 수기 메모에서는, 문서 작성에 앞서 콘돔을 공수하도록 육군성 건축과가 관방(官房, 육군성)에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 콘돔 발송을 의뢰한 문서에 첨부된 수기 메모. 왼쪽은 메모를 활자로 옮긴 것으로, "이번 추송품은 급히 필요해 작년 12월에 이미 현품을 보냈으므로 발령 일자를 쇼와 12년 12월 28일 자로 처리해 주기 바람"이라는 내용이다(출처: 「위생방독품 추송에 관한 건」 『지수대일기(密) 기8 쇼와 13년 2월 24일부터 2월 27일까지』)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46쪽 도판을 가공했다.
진중일지로 보는 위안소 구조와 위치
위안소를 어떤 구조로 어디에 건축했는지도 '진중일지'에 설계도와 지도 등을 포함해 꼼꼼히 기록돼 있다.
여기서부터는 책에서 한 장(章)을 할애한 오키나와 사례를 살펴본다.
예컨대, 1944년 5월 24일 제50비행장대대는 위안소를 건축하라는 작전명령 제43호를 요새건축근무 제6중대에 내렸다. 작전명령으로 내려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 씨는 지적한다.

▶ 5월 24일, 이에지마(伊江島)에서의 작업명령 부분(출처: 「진중일지 제2호 쇼와 19년 5월 1일부터 쇼와 19년 5월 31일까지(2)」 『요새건축근무 제6중대 진중일지(2/7) 쇼와 19년 5월 1일~19년 5월 31일』)
1944년 5월 31일에 시작된 '위안소 건축'을 위해 병영 숙소(兵寮)와 '주보(酒保, 물품판매소)' 평면도까지 첨부돼 있다. 병영 숙소는 4㎡(1.2평) 정도의 방 19개가 늘어서고 입구에 사무소를 두는 전형적인 위안소 구조다. 하 씨는 작업 내용으로 보아 병영 숙소가 위안소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 병영 숙소와 물품판매소 평면도(5월 29일)(출처: 「진중일지 제2호 쇼와 19년 5월 1일부터 쇼와 19년 5월 31일까지(2)」 『요새건축근무 제6중대 진중일지(2/7) 쇼와 19년 5월 1일~19년 5월 31일』,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410쪽)
제15대대장, 중대장까지 모인 위안소 개설 기념 회식
1945년 1월 10일, 난조(南城)에서 시키시마칸(敷島館)이라 불린 위안소의 개설 기념 회식이 열렸다(제4중대 진중일지). 일지에는 제4중대장이 "후나코시(富名腰) 위안소 시키시마칸 개설 피로(披露)를 위해", "부대장·위원 회식 건으로" 오후 5시 "출발"하여 22시에 "귀대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 씨는 제15대대장과 담당 '위원', 중대장까지 모인 개설 기념 회식은 위안소가 민간 성매매 업소와 다름을 상징하는 증거 중 하나라고 본다.

▶ 위안소 개설 기념 회식이 열렸다고 적힌 1월 10일 진중일지(출처: 「진중일지 제1호 독립보병 제15대대 제4중대 1월 10일」 『진중일지(독립보병 제15대대 제2중대 및 제3·제4·제5 각 중대) 쇼와 20년 1월 1일~20년 1월 31일』)
독립보병 제15대대 본부의 '진중일지'에는 「후방시설에 관한 내규」(이하 내규)가 실려 있고, 세세한 규정이 적혀 있다.

▶ 「후방시설에 관한 내규」에 기재된 화대(출처: 「1월 8일 진중일지」 『진중일지(오키나와 독립보병 제15대대 본부) 쇼와 19년 12월 1일~20년 1월 30일』)
1944년 12월 4일에 나온 62회보(90호)와 비교하면 전후반야 요금 이외는 동일하다. 하 씨는 "이로부터 사단이 위안소 요금을 일괄적으로 통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62회보'는 제62사단이 부대 운영 전반에 관한 지시를 내린 공식 문서인 『제62사단 회보(석병단회보)』를 묶은 철을 가리킨다.
"당분간 표(切符)제로 하고, 종업원 1명에 대해 하루 하사관 2매, 병 3매 이내로" 하여, 아래 그림과 같은 표를 대대본부가 발행했다. 그 뒤에는 "경영자는 전항 양식의 위안권을 휴대하지 않은 자는 출입시키지 않는 것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 「후방시설에 관한 내규」에 첨부된 위안권. 이를 휴대하지 않으면 위안소에 출입할 수 없다(출처: 「1월 8일 진중일지」 『진중일지(오키나와 독립보병 제15대대 본부) 쇼와 19년 12월 1일~20년 1월 30일』)
전투부대의 후방시설로 개설된 위안소
전선 전투부대의 작전행동에 불가결한 후방시설로 위안소가 개설됐다는 점도, 위치를 기록한 '진중일지'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영외(營外) 주보 개설을 알리는 1945년 1월 26일 '진중일지'에 첨부된 그림을 보자.

▶ 독립보병 제15대대, 난조(南城)의 위안소 위치(출처: 「1월 26일 진중일지」 『진중일지(오키나와 독립보병 제15대대 본부) 쇼와 19년 12월 1일~20년 1월 30일』,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470쪽)
하 씨는 "병사는 할당된 외출일에 주둔지 근처 위안소에 줄지어 드나들면서 미군 상륙에 대비했다"고 본다.
위안소 관리와 이용 실태
위안소 설치 후, 실태는 어땠을까.
제62사단의 '석병단회보(石兵団会報)' 9월 28일 자(62호)에서는 후방 지원에 관한 5개 항목을 들고 있다.
하 씨는 항목 2에 '군 시설'이라는 인식이 드러난 데 대해 "통상의 성매매 시설이 아니라 위안소를 '군 시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 9월 28일(석병단회보 62호) 후방 지원에 관한 5개 항목 부분. 위안소 실태를 알 수 있다(출처: 「제62호 석병단회보철」 『제62사단 회보철(독립속사포 제22대대 수령)』)
"죽는다면 군과 함께" — 피난에서 제외된 '위안부'
오키나와 본섬에서 동쪽으로 약 360km에 위치한 다이토(大東) 제도. 그중 오키다이토지마(沖大東島, 별명 라사섬)는 현재 무인도지만, 1944년 4월 26일 제85병참경비대 제4중대가 본격 숙영 태세에 들어갔다.
다이토 제도 전역을 관할한 보병 제36연대, 즉 다이토 수비대는 오키다이토지마에 거주하는 '민간인'의 피난을 결정하면서도 '위안부'는 그 대상에서 제외했음을 다음 문서에서 알 수 있다. 1944년 12월 27일 오후 1시 30분에 도착한 다이토 수비대 전문 602호다.
"'기상부' 근무자 및 '위안소'를 제외한 전면 철수를 지도할 것"

▶ '위안부'를 피난 대상에서 제외한 다이토 수비대 전문 602호 부분(출처: 「진중일지 12월 27일」 「진중일지 쇼와 19년 12월 1일부터 쇼와 19년 12월 31일까지 다이토지마 지대(支隊) 제4중대[2]」 『진중일지 쇼와 19년 3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5월, 6월 결락)』)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리타 요시오(森田芳雄) 수비대장이 전후 회상기 『라사섬 수비대기(ラサ島守備隊記)』(가와데쇼보신샤)에서 "죽는다면 군과 함께"라고 표현한 사실이라고 하 씨는 말한다. 2월 17일 다이토 수비대가 150호 전문으로 오전 9시 50분 정호(丁号) 전비(戰備, 전투 준비를 말함) 이행을 지시한 것처럼, 이 표현은 결코 과장도 허언도 아니었다.
이를 받은 제4중대는 작전명령 11호를 하달했다. 4개 항목 중 마지막은 "군 위안소는 내일 아침 이후 평상시대로 기거할 것"이었다. 하 씨는 "군 위안소는 병사와 마찬가지로 전투에 즈음하여 발령하는 작전명령에 포함돼 있었다"고 본다.

▶ 위안소를 전투에 끌어들이려 한 제4중대 작전명령 11호(출처: 「진중일지 쇼와 20년 2월」 『진중일지 쇼와 20년 2월 1일부터 쇼와 20년 2월 28일까지 다이토지마 지대 제4중대』)
하 씨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가 계속 줄어드는 지금, 위안소 시스템 규명이 한층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역사적·구조적 성폭력을 증명하려면 위안소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군대가 어떤 전쟁을 했는지 연구·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남아 있는 문서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 구조적인 작동 방식을 밝혀낼 수 있다.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교도 쉬워진다."

▶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제32군 사령부호(壕) 입구 부근에 설치된 설명판(2026년 5월 18일, 촬영: 오카모토 유카)
오키나와현은 오키나와전에서 구 일본군이 슈리성(나하시) 지하에 만든 제32군 사령부호 보존과 공개를 위해 오키나와현립예술대학 주차장 부지에 전시시설을 개설할 예정이었으나, 올해 들어 안전 대책과 문화재 보호 등의 관점에서 개설 시기를 3년 늦춰 2032년도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2012년 2월, 오키나와현이 제32군 사령부호 입구 부근에 설치할 설명판의 문안에서 '주민 학살'과 '위안부' 문구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다고 당시 오키나와 언론 각사가 보도했다. 설명판 설치 검토위원회 내부에서 해당 기술(記述)의 복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현 안에서는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왜곡한다는 등의 비판이 분출했다. 그러나 현은 "현 내외에서 항의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삭제를 철회하지 않았고, 설명판은 같은 해 3월 그대로 설치됐다. 이 점도 전시시설 개설을 앞두고 다시 주목받을 것이다.
번역정리: 조연우
출판: 김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