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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우생사상에 근거한 의료 윤리와 인권침해① 도쿄재판에서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와 그 이유-우다가와 고타 교수에게 듣다

KINN 2026.09.30

검증: 우생사상에 근거한 의료 윤리와 인권침해① 도쿄재판에서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와 그 이유-우다가와 고타 교수에게 듣다

일본 독립언론 생활뉴스커먼스는 KINN의 2026년 탐사기획보도 지원을 받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는 〈심판받지 않은 전쟁범죄〉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군 위안부’와 ‘인권침해 전쟁범죄’ 두 갈래로 진행합니다. KINN은 이 시리즈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해 생활뉴스커먼스와 동시 게재합니다.-KINN 편집자 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추축국이던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묻는 대규모 재판을 열었다. 먼저 1945년 독일에서 사상 첫 대규모 전쟁범죄 재판으로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이어 1946년 5월 3일부터 약 2년 반 동안 423회의 심리에 걸쳐 '극동국제군사재판(이하 도쿄재판)'이 진행됐다. 도쿄재판에서는 인권침해인 전시 성폭력이 거의 심판받지 않았고, 인체실험 사안에서도 731부대는 심판받지 않은 채 끝났다.

한편 독일에서도 전쟁 중 나치가 수용소에서 저지른 인체실험과 전시 성폭력 등이 확인됐고, 인체실험은 연합국이 심판했다.

『도쿄재판 연구—무엇이 심판받았고, 무엇이 남겨졌는가』(이와나미쇼텐)의 저자인 주오(中央)대학 우다가와 고타 교수(일본현대사)를 인터뷰해, 도쿄재판에서 전시 성폭력이 경시되고 731부대도 추궁받지 않은 이유와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을 물었다.-생활뉴스커먼스 편집자 주

▶ 온라인 인터뷰에 응하는 우다가와 고타 주오대 교수(2026년 8월 21일)

—— 도쿄재판에서는 전시 성폭력이 제대로 추궁되지 않았고, 인체실험을 한 731부대도 연합국의 추궁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두 범죄가 소추 대상이 되지 않은 경위와 이유를 어떻게 보나?

우다가와 먼저 일본군 위안소나 전쟁터에서의 성폭력 등 실제로 벌어진 전시 성폭력은 도쿄재판에서 적용된 '통상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도쿄재판이 열린 당시에는 젠더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세계적으로 현저히 낮았다. 그래서 성폭력을 개별적으로 언급한 증거는 압도적으로 적었다.

도쿄재판에서는 전쟁터의 주민 학살 등에 관한 증거 속에서 성폭력이 부수적으로 언급된 경우는 있었지만, 이 역시 전체 건수로 보면 압도적으로 적다. 도쿄재판에서 가장 많이 추궁된 전쟁범죄는 구미 국가 출신 포로에 대한 학대다.

도쿄재판

1946년 5월 3일부터 1948년 11월 12일까지 도쿄 이치가야(市ヶ谷)의 옛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렸다. 연합국 11개국이 판사를 파견했고, 일본의 전쟁 지도자 28명이 기소됐다. 재판의 목적은 전쟁을 계획하고 지휘한 지도자에게 개인 책임을 묻는 데 있었다. 이 재판에서 채택된 증거는 3,915건, 법정에 출석한 증인은 419명에 이르렀다. ①A급 범죄(평화에 대한 죄): 침략전쟁을 계획·수행한 책임 등 ②B급 범죄(통상의 전쟁범죄): 포로 학대 등을 중심으로 추궁했다.

—— 증거 건수가 적고 추궁이 불충분했던 원인을 어떻게 보나?

우다가와 도쿄재판이 연합국 가운데서도 구미 국가들의 주도로 열리고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판 진행 방식을 보면 ①구미 국가 포로에 대한 학대 ②구미 국가 민간인의 피해 ③아시아 민중의 피해 ④논점조차 되지 못한 식민지 지배라는 엄연한 서열에 따라 심리가 이뤄졌다고 해도 좋다.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피해는 구색 맞추기 정도로 다뤄졌다는 것이 실상이었다.

애초에 도쿄재판이나 당시 국제법에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심판한다'는 의식이 결여돼 있었다는 사정이 있다.

'헤이그 육전조약'(1907년)에도 성폭력만을 다룬 조항은 없었다. 성폭력은 주민 학살이나 학대의 일종으로, 혹은 (이것 자체가 매우 큰 문제이지만)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로 인식됐다고 볼 수 있다.

또 도쿄재판의 재판관과 검찰관이 모두 남성 중심이어서 성폭력의 문제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 731부대의 인체실험도 다뤄지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보나?

우다가와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 게이오대 명예교수와 가나가와대 명예교수였던 고(故) 쓰네이시 게이이치(常石敬一)의 연구가 지적해 온 대로라고 생각한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 비밀부대인 관동군 방역급수부(731부대)가 갖고 있던 인체실험 데이터를 넘겨받는 대가로 도쿄재판에서 부대 관계자들의 면책이 추진됐다는 것이다. 731부대의 정보를 독점하려 한 미국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

——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도쿄재판 같은 재판이 늘 열리나?

우다가와 최초의 대규모 국제군사재판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이다. 이에 앞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전쟁 지도자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과 전쟁을 위법으로 보는 생각이 생겨났다. 당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 황제를 재판할 계획이 있었지만, 황제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는 바람에 재판하지 못했다. 1928년 8월에는 파리에서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부전조약)이 체결됐다. 이처럼 예전부터 재판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세계적으로 이어져 왔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실제로 실시된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

통상의 전쟁범죄뿐 아니라 '평화에 대한 죄'와 '인도에 대한 죄'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전쟁범죄자를 심판한 첫 재판. 1945년 8월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에 '전쟁범죄'와 함께 평화와 인도에 대한 두 가지 죄를 명문화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을 네 가지 소인(訴因)으로 기소했다. 주요 전범 24명을 다룬 재판과 함께 의사, 나치 친위대(SS) 대원, 고위 관료 등 185명을 다룬 12건의 후속 재판(계속재판)으로 이뤄졌다. 도쿄재판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도쿄재판에서 전시 성폭력이 경시되고 731부대가 추궁받지 않은 것이 이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우다가와 도쿄재판에서 심판받지 않은 죄가 가시화됐다면 정치와 사회에 그 기억이 남았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반면 구미 국가 포로에 대한 학대는 철저히 추궁됐고, 일본의 정치인과 외교관 사이에도 포로 학대가 문제였다는 인식이 일부나마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거꾸로 재판에서 추궁되지 않은 일은 정치와 사회 속에서 인식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전시 성폭력의 경우 성폭력을 막기 위한 규칙 만들기가 늦어지고 말았다. '위안부' 제도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궁했다면 국제법상 중요한 판례를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 금지는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국제법에 명문화돼 추궁되기 시작했다(로마규정 등). 로마규정은 인도에 대한 죄의 하나로 강간, 성적 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 강제불임, 또는 이에 상당하는 기타 중대한 성폭력을 규정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규정된 것이다. 도쿄재판뿐 아니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심판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 만약 도쿄재판에서 731부대를 다뤘다면 어떤 방식이 상정됐을까. 책임을 묻지 않은 데 따른 영향은 어떻게 보나?

우다가와 731부대를 다룬다면 '통상의 전쟁범죄'(B급 범죄)로서 헤이그 육전조약과 제네바협약 위반으로 다뤄졌을 것으로 본다. 재판에서 이 전쟁범죄를 정면으로 묻지 않으면서 '전쟁과 의학'의 문제가 가려지고 말았다. 재판 뒤에도 의료 윤리가 문제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설립 때부터 731부대 출신자들이 관여한 '미도리주지(ミドリ十字)'(1950년 '일본블러드뱅크'로 설립)의 약해(藥害) 에이즈 사건이다. 전후 의학계에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약해(藥害) 에이즈 사건

1980년대 일본에서 바이러스가 불활성화되지 않은 혈액응고인자 제제(비가열 혈액제제)를 사용하는 바람에 많은 혈우병 환자가 HIV에 감염된 사건. 비가열 제제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유통했다는 이유로 미도리주지 경영진이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지금까지 도쿄재판 연구는 어디까지 진전됐나?

우다가와 1970년 이후 미국이 자료를 공개하면서 연구가 진전돼, 연합국이 어떤 발상과 방침으로 전범재판을 열려고 했는지가 규명돼 왔다. 국제군사재판 개최를 전제로 전쟁범죄를 조사한 '연합국 전쟁범죄위원회'의 논의 내용과 미국 측의 전쟁범죄 정책 등도 밝혀졌다. 피고인 선정 과정, 물밑에서 이뤄진 미·일 간의 천황 및 전쟁범죄 면책, 재판의 종결 과정도 드러났다. 미국이 공개한 재판 자료 가운데 특히 검찰 측 자료를 폭넓게 활용해 검증한 결과, 미국이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었다는 점, 일본의 '온건파'가 연합국에 적극 협력해 육군 중심의 군부에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 전후 지배체제를 확립한 '미일 합작'의 측면 등이 밝혀졌다.

반면 심리 과정과 변호 측에 대한 검토는 최근에야 겨우 진전되기 시작했다. 새로 공개된 변호 측 자료까지 바탕으로 재판 심리를 종합적으로 연구해 문제점과 특징을 밝혀내는 일이 앞으로도 필요하다.

프로필

우다가와 고타(宇田川幸大)

주오대학 상학부 교수. 일본현대사 전공. 역사학의 관점에서 방대한 재판 자료를 읽어내며 심리의 특징과 문제점, 그리고 재판이 전후 세계와 일본에 어떤 '미해결 과제'를 남겼는지 분석하는 등 도쿄재판의 전체상을 탐구해 왔다. 사학사와 일본의 역사 인식 등에 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후기과정을 마치고 박사(사회학, 히토쓰바시대학)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역사적으로 생각하기』(이와나미 주니어신서, 2025년), 『우리와 전후 책임』(이와나미 부클릿, 2023년), 『도쿄재판 연구』(이와나미쇼텐, 2022년) 등이 있다.

번역정리: 조연우